본문 바로가기

책 읽는 엄마/엄마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나는 이 책을 펼치면서, 어떤 가르침을 받게 될까,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생각했다.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중 한 명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말해주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어떤 건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mac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 매였습니다. -p.150/151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밀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없이 개인적인 일입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을 마주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없었던 지점에서 가공의 이야기를 일궈내고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바꿔나갑니다. 형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주관적인 일들을 형상이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적어도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환해간다 - 극히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것이 우리 소설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작업입니다.
"아니, 나는 서재 같은 대단한 건 없는데요"라는 사람도 아마 계시겠지요. 나도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서재 따위는 없었습니다. 센다가야의 하토노모리하치만 신사 근처의 비좁은 아파트(지금은 철거되었지만)에서 주방 식탁을 마주하고 아내가 잠들어버린 한밤중에 나 혼자 원고지에 사각사각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 처음 두 권의 소설을 써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두 편에 (내 마음대로) '키친테이블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p.175/176

 

 

무라카미 하루키가 앉아 사각사각 글을 쓰던 키친테이블은 어떤 타입이었을까? (좌: 츨처 - 킨포크 테이블TW0 / 우: 출처 - 고베 밥상)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전업 작가가 되면서부터 달리기를 시작해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쓰던 때부터) 삼십 년 넘게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달리기나 수영을 생활 습관처럼 해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매일 달리느냐, 의지가 참 강하다, 라고 감탄하는 소리도 들리는데, 내가 보기에는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퇴근하는 일반 샐러리맨이 체력적으로는 훨씬 대단합니다.

러시아워에 지하철을 한 시간씩 타는 것에 비하면 나 좋을 때 한 시간 남짓 달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특별히 의지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달리기를 좋아해서 그냥 내 성격에 맞는 일을 습관적으로 계속하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삼십 년씩이나 계속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리고 그런 생활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나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조금씩 높아지고 창조력은 보다 강고하고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을 평소에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를 내보이면서 "자, 이렇게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감촉으로서, 실감으로서, 그런 게 내 안에 있습니다. -p.184/185

 

 

 

<하루키 일상의 여백> 중에서.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삼십년 이나 매일 달리기를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매일 하는 출퇴근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싫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기는 내 마음대로 안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안 해도 그만인 것'을 매일매일 한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으로 늘 '체력'을 꼽았다.
체력이 어디 작가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너무나 당연해서 모두들 등한시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하루키가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긍정적 감정들 (위에서 말하듯, 작가로서의 능력이 조금씩 높아지고 창조력은 보다 강고하고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을 주위에 말하면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날마다 달리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 자신은 오래도록 뭔가 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달리다 보면 물론 몸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니다, 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좀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라고.

하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나도 확실히 알지 못했었고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우선 이 달리는 습관은 끈질기게 유지했습니다. 삼십 년이라면 상당히 긴 세월입니다.

그만한 세월 동안 줄곧 한 가지 습관을 변함없이 유지하려면 역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달린다는 행위가 몇 가지 '내가 이번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상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략적인, 하지만 강력한 실감(체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 -p.186/187

 

 

 

<하루키 일상의 여백>중에서.

 

 

 

당신이 (안타깝지만) 희유의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방식의 질을 레벨업 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의 스토리와 자신만의 문체를 각자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p.200/201

 

 

 

2014년 3월 구입. 책장을 넘기다가 마음 가는 글을 읽으면 좋다. 담담하게.

 

 


당신은 당신의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프란츠 카프카를 예로 들자면, 그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작품의 이미지로 보면 그야말로 예민하고 육체적으로 허약한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몸을 만드는 데 진지하게 신경을 썼던 모양입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하루 1마일(1600미터)씩 수영을 하고 날마다 시간을 들여 체조를 했다고 합니다.  -p.201


맙소사! 정말 의외였다.
<변신>의 그 카프카가!!
낮에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밤에 글을 썼다는 카프카. 그러고 보니 생업과 글쓰기를 병행할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 관리와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나는 그런 이면을 생각하지 못한걸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카프카의 작품을 보면 예민하고 허약한, 창백한 얼굴을 한 신경쇠약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 날마다 수영을 하고 체조를 하고, 채식을 했다.


난 천재가 아니니 (이것만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고 ,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하며,
나의 방식을 찾아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