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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엄마/엄마의 책

에쿠니 가오리의 <달콤한 작은 거짓말> 그리고 그녀의 그림책 <몬테로소의 분홍 벽>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뽑아왔다.
<달콤한 작은 거짓말>이라는 제목.
그리고 사실은 이 책이 단편소설집인 줄 알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가볍게 훅훅 읽고 싶은 마음에 단편소설을 골랐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편이 아니었다!)

 

 

 

 

 

 

나는 단편인 줄 알고 고른 장편소설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단편소설처럼 휘리릭 읽어버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바로 그런점이 좋다.
가볍지 않은데 가볍게 읽힌다.

 

 

 

 



그리고 늘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루리코와 사토시는 부부다.
매일 7시 반에 귀가하는 남편 사토시. 그의 일상은 늘 똑같이 반복된다.
집에 돌아오면 루리코가 차려준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방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게임에 몰두한다.
루리코는 그에게 전화로 말을 한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부부가 전화로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 둘은 각자 애인이 생긴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 이상한 인물들을 작가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런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우리 주위에 있지 않은가!
그들이 꼭 이상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이런 사랑도, 이런 삶의 방식도 있다고.
서로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루리코와 사토시.
그들의 <달콤한 작은 거짓말>도 역시 그럴수 있다고.

 

 

 

 

 


이렇게 늘 조금은 (어쩌면 아주 많이) 독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작가의 그림책은 어떤 내용일까?
먼저 너무나도 예쁜 분홍색 책 표지가 왠지 에쿠니 가오리, 그녀다웠다.
그림책에는 '하스카프'라는 독특한 (역시나!)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꿈꾸는 고양이 하스카프

 

 

 

예쁜 실을 길게 당긴 것처럼 꼭 감은 눈과 사려 깊은 이마를 가진, 몬테로소의 분홍 벽이 있는 곳으로 가는 꿈을 꾸는.

 


"전 이 집을 떠나야 해요."
하스카프가 그렇게 말하자, 부인은 무척 놀랐다.
"떠난다고? 어딜 간다는 거니?"
"몬테로소에 갈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는 하스카프의 눈은 이미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몬테로소의 분홍 벽을 찾아 길을 떠나는 하스카프

 

 

 

길을 떠나는 날, 하늘은 더없이 맑게 개었다.
"네가 떠나고 없으면 허전하겠구나."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정말 애틋한 이별이었다. 하지만 하스카프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별의 인사로 부인의 발을 날름 핥고, 항구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몬테로소에 갈 거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도 해야 한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는 이 부분에서 훗날 내 품을 떠날 아이를 떠올렸다.
몬테로소의 분홍 벽을 찾아 길을 떠나는 하스카프 처럼, 아이도 언젠가는 자신의 꿈을 찾아 내 품을 떠나겠지.
역시, 나의 정체성은 어쩔 수 없이 '엄마'인가보다.
그림책을 읽으며 또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하스카프는 긴 여행길에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팠다.
그럼에도 하스카프는 야옹야옹 거리며 먹을 것을 얻는 것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쥐를 잡는다.
그리고는 파이를 굽고 있는 부인에게 넉살 좋게도 이런 부탁까지 한다.



"그런데 그 파이. 이제 오븐에 넣을 거죠? 이 쥐도 같이 구워주시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소금도 뿌려주시면 좋겠어요."

 

 

 

배가 고파 쥐를 잡는 하스카프

 

 

 

하스카프는 쥐 구이를 한껏 먹었다.
쥐 구이는 껍질은 바삭한데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정말 황홀한 맛이었다.
하스카프는 천천히 우아하게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먹었다. 뼈까지 요리조리 핥아먹어 토실토실 살이 쪘던 쥐의 뼈는 조개껍데기처럼 깨끗해졌다.

 

 

 

천천히 우아하게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쥐 구이를 먹은 하스카프

 

 

 

하스카프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어느 늦은 밤, 하스카프가 역 앞의 큰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커다란 건물에서 소년 다섯 명이 뛰쳐나왔다. 하스카프는 그중 한 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다른 집에서 데려간 동생을 닮았기 때문이다.
"야, 거기 서!"
경찰이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소년들은 조금 전 은행에서 돈을 훔쳐 나온 것이었다.
"안 서면 쏜다!"
하스카프는 폴짝 뛰어 경찰의 팔을 깨물었다. 도덕적인 고양이는 아니니까.
"아악!"
경찰은 놀라 자빠지고, 소년들은 무사히 도망치고, 하스카프의 여행은 또다시 계속되었다.

 

 

 

도덕적인 고양이는 아니니까!

 

 

 

'도덕적인 고양이'라니! 너무나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몇 밤이 지났을까?
하스카프는 드디어 몬테로소의 분홍 벽에 다다랐다.

 

 

 

드디어 찾은 몬테로소의 분홍 벽

 

 

 

거기에서 하스카프는 며칠을 움직이지 않았다. 연한 갈색 몸을 웅크리고 부인의 집 거실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꾸벅꾸벅 잠을 잤다. 꿈과 현실의 구별이 사라지고, 하스카프는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