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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엄마/아이의 책

할머니의 팡도르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 외딴집에 홀로 살고 계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밀가루와 달걀을 섞으며 무심히 중얼거립니다.

"죽음이 나를 잊은 게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할머니는 특별한 빵을 만듭니다.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 없고 어디에도 기록된 적 없는 오직 할머니만의 비법으로.

그리고 그때, 할머니를 잊은 줄 알았던 사신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신이게 말합니다.

 

 

 

 

 

 

"아이고 사신 씨, 뭐가 그리 급해요. 잠깐 기다려 줘요. 이제 막 크리스마스 빵에 넣을 소가 완성될 참이라고요. 이것만 마저 합시다."라고.

사신이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할머니의 부드럽고 달콤한 반죽이 사신의 입안 가득 퍼집니다.

그 뒤로도 사신은 몇 번이나 더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사신은 그때마다 갈등하고 고민하고, 번번이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할머니는 사신을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아이들이 둘러앉은 부엌, 하얀 천이 깔린 식탁 위에는 할머니가 만든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작은 촛불과 눈처럼 흩뿌려진 아이싱 쿠키, 바삭하게 구운 찰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할머니의 금빛 팡도르가 별처럼 가득 빛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러니의 빵과 과자를 맛보았습니다.
금빛 팡도르가 불가의 온기보다도 더 따뜻하게 사신의 마음을 녹여주었습니다.
사신은 더 이상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무슨 수로 수행할지.

 


그녀의 슬픈 마음을 먼저 알아챈 것은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앞치마를 풀었어요.
"이제 갑시다"
할머니가 말했어요.
"찰다 속에 레시피를 숨겨 두었으니 이제 비밀은 아이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거예요.
이제 갈 시간이야."

 

 

 

 

 

 

할머니와 사신은 함께 외딴집을 나섰습니다. 둘은 나란히 차고 흰 눈길 위를 걷기 시작했어요.
날이 저물고 강물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천천히 마을을 삼켰습니다.
집과 나무들은 유령처럼 희미해졌고 두 여인의 뒷모습은 솜사탕처럼 가벼워졌습니다.
둘은 안개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갔어요. 그렇게 할머니는 강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왜 일까?
이 짧은 그림책을 읽으면서 왜 갑자기 눈물이 날 것처럼 마음이 일렁이는 걸까.
아이에게 읽어주기 전에 먼저 책장을 넘겨보던 나는 책의 첫 문장에서 마음을 빼앗겼다.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한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이 문장에 말이다.

할머니의 부엌에서 풍기는 설탕과 향신료에 졸인 귤 향기에 나도 사신처럼 마음을 붙잡히고 만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가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이 책을 꼭 읽어주고 싶다.
혼자 읽게 하지 않고 아이 옆에 꼭 붙어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고 싶다.

내 인생의 레시피는 어디에다 숨겨 놓을까?
부디 아이가 잘 찾을 수 있는 곳에 숨겨놓길.
그리고 "이제 갈 시간이야."라고 말하며 솜사탕처럼 가볍게 떠날 수 있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