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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이야기

홍차와 장미의 나날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예쁜 책 표지와 예쁜 책 제목에 끌렸다.

 

 

 

'모리 마리'라는 작가는 누구일까? 이름도 책만큼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옮긴이의 서문에서 나의 궁금증은 단번에 풀렸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모리 마리는 바로 '모리 오가이'의 딸이었다!

모리 마리는 '모리 오가이의 딸'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을까? 

대부분은 누구누구의 딸, 아들이라고 불리는걸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 서문에서 보니 모리 마리는 아버지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마리 역시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던 것으로 봐서는 '모리 오가이의 딸'이라고 불린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그녀가 모리 오가이의 딸이라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렇다면 그녀는 몇 년생이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침과 동시에 '마리는 이 휘황한 아버지와 특이한 어머니 사이에서 1903년에 태어났다.' 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1903년? 1903년??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모리 오가이의 딸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왜 이토록 놀라울까?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과 그녀의 이름, 책의 제목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녀를 나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작가 서문에 나오는 모리 마리에 대한 소개글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그녀의 일생을 소재로 소설을 써도 될법했다.

아니면 모리 마리 같은 캐릭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 성년이 될 때까지 마리는 부유한 집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랐다. 집에 하인들은 물론이고 말과 마부까지 따로 있었으니 그 호화로움은 요즘 시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마리를 귀여워했는데, 특히 오가이의 딸 사랑은 유명해서 열대여섯 살까지 무릎에 앉힐 정도였다. -p.5

 

그러나 그녀는 두번의 이혼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작가가 된 마리는 1957년에 아버지에 대해 쓴 수필집 <아버지의 모자>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는다.

또 소설 <달콤한 꿀의 방>으로 이즈미 교카 문학상, <연인들의 숲>으로 다무라 도시코 문학상을 받아 작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p.8

 

생활고로 인해 글을 썼는데, 이 정도다. 역시 모리 오가이의 딸이기 때문일까?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침대 위를 은접시와 유리병으로 장식해 유럽으로 변신시키고, 흔한 올리브색 천에서 보티첼리의 회화를 연상할 수 있었던 정신적 귀족. 풍요했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비관에 빠지는 일 없이 자기만의 미의식으로 세운 왕국에서 우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천진하고도 강한 사람. 어쩌면 아버지를 잃고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아이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마리의 성년 이후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p.9

 

 

 

아, 모리 마리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사람의 글은 어떤 색일까?

나는 더욱 더 이 책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제일 처음 글인 '메이지풍 서양요리와 양배추 말이'에서 나의 마음에 콕 들어오는 문장을 발견했다.

 

"지금도 나는 외롭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콩소메와 콜드 비프, 감자를 넣은 채소 샐러드를 먹는다."

 

콩소메와 콜드 비프, 감자를 넣은 채소 샐러드라니!

먹다 보면 외로움도 괴로운 일도 모두 잊힐 것만 같은 음식이다.

나는 점점 '모리 마리'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사이세이를 닮은 개와 차가운 장어 요리>라는 글에서는 그녀의 매력이 더욱 짙게 드러난다.

여기에 나오는 사이세이는 아버지 모리 오가이의 동료이다. 옮긴이 서문에 보면 

'특히 무로우 사이세이는 마리에 대한 걱정에 밤에도 잘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라는 글이 있다.

그 정도로 사이세이는 모리 마리를 친딸처럼 아꼈었나 보다.

그런 사이세이에 대한 글이다. 그녀는 어떻게 썼을까?

 


예전에 소설가이자 시인인 무로우 사이세이를 쏙 빼닮은 개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개는 눈두덩이가 푹 꺼져 시꺼멓게 찍혀 있어서, 사이세이가 "오, 모리 마리 왔는가"라고 반길 때가 아니라 "모리 마리가 장어가 싫다고 하면 주지 마"라고 화낼 때의 표정과 닮았다. 사이세이는 얇게 구워 식힌 장어 요리를 좋아해서 늘 차가운 장어를 내게 대접했다. 얇게 구운 깔쭉깔쭉한 장어 속 기름이 차갑게 식어 굳어 있는 게 너무 맛이 없어서, 나는 그만 그 이야기를 <주간 신초>의 연재 글에다 써버렸다. 그러자 사이세이는 몹시 화를 냈고, 다음번에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식탁에 장어 요리가 올라오자 "마리가 장어가 싫다고 하면 주지 마!"라고 말했다.

사이세이는 소설가 나가이 가후, 모리 오가이와 함께 화를 쉽게 잘 내는 인물로 유명했다. 사이세이의 문장은 곧바로 화를 내는 사람다운 문장이지만, 침착한 문인이라는 느낌의 가후도, 이성의 빛이 그득한 문장을 쓰는 오가이도 사실 금세 화를 내는 다혈질이었다. 물론 사이세이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소설가다. 마치 스승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나를 대해줬던 소설가다.

그 스승 같고 아버지 같은 사이세이가 미식으로서 내어주는 요리는 미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먼저 꾹 참고 장어를 먹은 뒤 그의 장녀 무로우 아사코가 요리한 소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를 넣고 끓인 수프와 볼락조림 등으로 얼른 입가심을 했다고 썼던 것이다. 그만한 일로 화낼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냈다.

고탄다의 장어 가게에서 장어를 포장해 사이세이의 집까지 자전거로 가져오면 딱 알맞게 식는다. 사이세이는 "얇게 구운 깔쭉깔쭉한 장어 속에 기름이 식어서 굳어 있는 모양부터 질렸다"라는 나의 묘사에 특히 화가 난 모양이다. "장어는 차가운 편이 기름져서 맛있어"라고 하며 식은 장어를 즐거이 먹는 사이세이의 미각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로 엄청나게 맛이 없는데! 하지만 사이세이가 그런 일로 심하게 심술부릴 정도로 나를 친근하게 여겼다는 점은 기쁘고도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천진함이 잘 드러난 글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에 대해 쓴 글 중에서. (아니다. 제목이 '파파에 대해' 서니까 모리 오가이를 떠올리며 쓴 글이겠지)

 

나는 이미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다. 여태껏 마음이 어른스러워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제 죽을 때까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기보다 언제까지나 나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인, 곤란한 인간인 것 같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듯 선종의 법력 높은 스님을 찾아간다 해도 안 될 것 같다. 만사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어리석고 평범한 인간이다. 쓸 수 있는 약은 없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나 자신만 생각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