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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이야기

하기와라 사쿠타로, <홍차와 장미의 나날>에서 만난 기억

내부에 있는 사람이 기형의 병자로 보이는 이유 - 하기와라 사쿠타로

 

나는 커튼 레이스 그늘에 서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얼굴을 흐릿하게 보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손에 망원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저는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습니다

니켈로 만든 개라든가 양이라든가

머리가 벗겨진 아이들이 걷고 있는 숲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저의 눈을 얼마간 흐릿하게 보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양배추 접시를 너무 먹었습니다

게다가 이 유리창은 너무나 엉터리입니다

그것이 저의 얼굴을 이렇게 심하게 일그러져 보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실상을 말하면

저는 지나칠 정도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거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어째서 그렇게 섬뜩하게 웃고 있는가

아아 물론, 저의 허리부터 밑이라면

그 부근이 분명치 않은 것이라면

다소 바보 같은 의문이지만

물론, 그러니까, 이 파리한 창문 벽을 끼고

집 내부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던 도중 알게된 것.

 

몹시 유감스럽게도 주변에서는 누구 하나 내가 요리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천재 시인 시라이시 가즈코와 도미오카 다에코를 비롯해 천재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 하기와라 요코도 (그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이라고 하면 화를 낸다. 그렇다면 고아가 아니면 안 되었던가? 물론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는 정작 본인도 때때로 내가 곤란해할 일들을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말하는 버릇이 있는 주제에,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는 네모난 안경 속 눈을 삼각형으로 만들었다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하며 화를 내므로 방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가까운 사람들 역시 내 얼빠진 얼굴이나 뭐든 곧바로 떨어트리는, 언뜻 보기에도 서투를 것 같은 손을 보고 내가 요리를 잘하기는커녕 요리를 만든다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 p.60/61 「요리 비망록 中」

 

나는 위의 글을 읽다가 순간 멈칫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 하기와라 사쿠타로. 귀에 익은 이름이다.

모리 마리가 모리 오가이의 딸이었다는 걸 알았을때 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내가 우연히 보게 된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시의 시인이 아니던가.

나는 오래전 적어두었던 그의 시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내부에 있는 사람이 기형의 병자로 보이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

그 시의 시인인 하기와라 사쿠타로.

그에게 딸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의 딸이 모리 오가이의 딸과 친분 있는 관계라니.

뭔가 소설같았다.

모리 마리의 글에서 보듯, 사쿠타로의 딸은 자신이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이라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은듯하다.

그리고 모리 마리의 글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은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자신이 모리 오가이의 딸임이 알려지는걸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모리 오가이처럼 딸을 애지중지하는 자상한 아빠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의 시를 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그의 딸이 자신을 하기와라의 딸이라고 하면 화를 냈던게 아닐까 싶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다가 내 기억속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를 만났다.

나는 뜻밖의 장소에서 아주 오래전 헤어졌던 누군가를 만난 기분이었다.


2007년의 오차노미즈.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를 읽게 된 것도 이때 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