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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이야기

하기와라 사쿠타로 단편선 <고양이 마을>

얼마 전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다가 그녀가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 (하기와라 요코 - 그녀는 자신이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딸이라고 불리면 화를 냈다고 한다)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혼자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오래전 내가 좋아했던 시 <내부에 있는 사람이 기형의 병자로 보이는 이유>의 시인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단편소설 <고양이 마을>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양이 마을>의 작가가 <내부에 있는 사람이 기형의 병자로 보이는 이유>의 시인과 동일인물이라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혼자 또 놀라워했다. 동일 인물의 글을 내가 좋아하고 있었다니!!
어쨌든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고양이 마을>을 다시 읽었다.
아마도 <고양이 마을>은 일본어 원서로, 시 <내부에 있는 사람이 기형의 병자로 보이는 이유>는 번역된 글로 보아서 둘을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번에는 <고양이 마을>도 번역된 책으로 읽어보았다.

 

 

 


<고양이 마을>은 모르핀 중독의 방향 감각이 무척이나 나쁜 (방향 감각의 상실이 모르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이 산책을 하던 중 사차원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겪은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나의 불가사의한 의문은 이로부터 새롭게 시작된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전에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나 스스로 이상히 여기어 말했다.

꿈의 나비가 자신인지 지금의 자신이 자신인지 하고.
이 하나의 오랜 수수께끼는 천고에 걸쳐 아무도 풀 수 없다.

착각 속의 우주는 여우에게 홀린 사람이 보는 것인지. 상식적인 이지의 눈이 보는 것인지.

애초에 형이상학의 실재 세계는 경치의 이면에 있는 것인지 표면에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아마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저 불가사의한 인간세상 밖의 마을.

창문에도, 처마에도, 길에도, 고양이 모습이 역력히 보였던 저 기괴한 고양이 마을의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의 산 지각은 이미 십 수년을 지난 지금에서조차도 여전히 그 두려운 기억을 재현하며 또렷이 바로 눈앞에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남들은 내 이야기를 냉소하며 시인의 병적인 착각이자 얼토당토않은 망상의 환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고양이만 살고 있는 마을, 고양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길가에 모여 있는 마을을 본 것이다.

이치나 논란은 접어두고 우주의 어딘가에서 내가 그것을 '보았다'라고 하는 것만큼 나에게 절대적인 사실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조소 앞에서도 나는 지금도 여전히 굳게 믿고 있다. 저 동해 연안 지방에 전설 속에서 구전되는 특수한 부락. 고양이 정령만이 살고 있는 마을이 분명히 우주의 어느 어딘가에 반드시 실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는 것을.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p.20/21」



늘 산책하는 익숙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분명 이 길이 맞는데, 전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면?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면?
창문가에도 길 위에도 가게 안에도 온통 고양이뿐이라면,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뿐이라면 어떨까?
작가의 말처럼 실로 기괴하고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어느 날, 다르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걷고 있는 길 이면의 세계에 살짝 발을 들였다가 나오는 게 아닐까?


내 고독 벽은 최근 상당히 밝게 변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몸이 옛날보다 튼튼해졌고 신경이 조금 유들유들하고 둔해졌다. 청년 시절에 나를 몹시 괴롭힌 병적 감각이나 강박관념이 해와 더불어 점차 정도가 약해졌다. 요즘 들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 나가더라도 갑자기 남의 머리를 때리거나 악담을 하거나 하는 충동적인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따라서 사람과의 응대가 즐거워지고 명랑한 기분으로 담소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활의 기분이 느긋하고 즐거워졌다. 하지만 그 대신, 시는 나이가 들면서 변변찮아졌다. 즉 나는 점차 세속의 평범한 인간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비탄해야 할 일인지 축복해야 할 일인지 알 수가 없다.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내 고독 벽에 관해서 p.41」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다. 처음 데뷔할 때의 예리한 감각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무뎌져 간다. 내게 그것을 비탄해야 할 일인지 축복해야 할 일인지 묻는다면 나는 축복해야 할 일이라고 답해주고 싶다.
무뎌지면 무뎌진 대로 그 나름의 예술적 활동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 시절엔 그 시절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나이가 들면 또 나이가 든 대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테니 말이다. 항상 같다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니지 않을까?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두 번째 시집 <우울한 고양이> 중에서.

 

 

담배나 술과 마찬가지로 교제도 역시 하나의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그 습관이 붙지 않는 동안은 꺼림칙하고 번거로운 법이지만 일단 한번 습관이 된 이상은 그것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필요한 일상이 되어 버린다. 요즘 들어서는 나에게도 조금 습관이 붙은 듯 어쩌다 남과 만나지 않는 날에는 쓸쓸함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담배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교제도 또한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담배가 습관적 필수품인 것처럼 교제도 또한 습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내 고독 벽에 관해서 p.42」



내가 요즘 그렇다. 매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대부분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지만), 어쩌다 별 다른 대화 없이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날은 묘하게 쓸쓸함을 느끼곤 한다.
나에게는 매일 마시는 커피가 습관적 필수품인 것처럼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도 습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사계절 중에서 나는 가을을 제일 좋아한다. 물론 이것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취향일 것이다.
원래 일본이라는 나라는 기후적으로 별로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여름은 습기가 많고 무더운 것으로 세계에 비할 곳이 없다고 일컬어지고, 봄은 하늘이 낮고 우울하며, 겨울은 종이로 칸막이한 집으로 견디기에는 추위가 너무 심하다.
(더구나 이런 종이로 된 집이 아니면 여름 더위를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기후로는 단지 가을만이 인간의 생활환경에 쾌적하고 적합하다.
하지만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이유 말고도 개인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가을은 산책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취미나 도락이 별로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낚시라든가 골프라든가, 미술품 수집 같은 취미와도 거리가 멀었다. 바둑이나 장기 종류는 좋아하지만 친구와의 교제가 없어서 승부를 겨룰 상대가 없기 때문에 결국 하지 못하는 상태다. 여행이라는 것도 나는 거의 한 적이 없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짐을 꾸린다든가 여비 계산이 귀찮고 게다가 여관에 묵는 것이 싫었다. 이런 나의 버릇을 아는 사람은 내가 매일 집 안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잡지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달라서 나는 글을 쓸 때 이외에는 거의 반나절도 집 안에 있어본 적이 없다. 들개처럼 종일 문 밖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유일한 '오락'이기도 하고 소일거리이기도 하다. 즉 내가 가을이라는 계절을 좋아하는 것은 문 밖 생활을 하는 부랑자들이 그것을 즐기는 것과 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다.



1886년 일본에서 태어난 시인의 취향과 나의 취향이 이렇게나 일치한다는 건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게 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대부분 나는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실신한 사람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슬 걷는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이지만 내 경우는 명상에 계속 빠져 있으므로, 만일 말이 있다면 '명상 산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나는 어떤 곳이라도 헤집고 걷는다. 하지만 대개는 도심의 시끌벅적하고 혼잡한 곳 속을 걷는다. 조금 걷다가 지칠 때는 어디라도 벤치를 찾아 앉는다.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가을과 산책' p.50」

앨런 포의 어느 소설 속에서 하루 종일 군집 속을 걸어 돌아다녀야만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불행한 남자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 심리를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가을날의 맑게 갠 하늘을 보면 내 마음에 이상한 노스탤지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딘지 모를 낯선 동네로 여행을 가고 싶어 진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대로 나는 기차 시간표를 조사하거나 짐을 꾸릴 수가 없기 때문에 늘 여행의 유혹이 마음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때로는 그다지 번거롭지 않은 가벼운 여행을 떠난다. 도쿄 지도를 주머니에 넣고, 혼조 후카가와의 모르는 동네라든가, 아사쿠사, 아자부, 아카사카 등의 숨은 뒷동네를 찾아 걷는다. 특히 무사시노의 평야를 여러 방향으로 관통하며 걷는다.



도쿄로 혼자 여행을 갔을 때, 잘 모르는 그냥 동네를 어슬렁 거리면서 돌아다녔었다.
그냥 막 걷다 보니 한적한 공원도 나오고, 오래된 헌책방도 나오고, 그러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 가게 주인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또 걷다가 걷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도 있다.
오사카의 한적한 골목길에서 아오링고 맛의 추하이를 마셨던 기억.
동네 골목에 있는 작은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런치.
나도 사쿠타로처럼 어딘지 모를 낯선 동네로 여행을 가고 싶어 진다.



집을 좋아하지 않는 나. 문 밖의 명상 산보 생활만을 하는 나는 천성적으로 부랑자의 핏줄을 타고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 자유롭게 혼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내 고독이 시키는 짓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문 밖에 있을 때만이 실제로 자유롭기 때문에.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가을과 산책' p.51/52」

모든 사람들은 신의 공평한 섭리 하에 평등해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왜냐하면 꿈은 그 사람의 선천적 기질이나 체질 특히 건강 상태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경질적인 사람이나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사람들이나 건강하지 못하고 병약한 사람들, 즉 한마디로 말하면 생존경쟁의 패배자적 소질을 갖은 사람들은 대개 모두 괴로운 꿈이나 무서운 꿈 혹은 남에게 따돌림당하는 꿈만 꾼다. 반대로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들이나 사교적이고 기력이 좋고 건강이 뛰어난 강건한 사람들, 즉 생존경쟁에서 우승할 소질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즐거운 꿈이나 밝고 빛나는 꿈만 꾼다. "부유한 자는 그 소유하지 못한 것도 부여되고, 가난한 자는 그 소유한 것도 빼앗긴다"라고 예수가 말한 성서의 말은 인생의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다. 행운의 별 아래서 태어난 사람은 밤의 꿈속에서도 행복하고 나쁜 별 아래서 태어난 사람은 꿈속에서조차도 이중으로 또한 불행하다. 꿈이 하룻밤만의 단편이고 기억의 연속을 갖기 때문에 또 허망하다는 것은 그나마 은총으로써 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중 '꿈' p.72」

「달에 울부짖다」로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생애를 걸고 기성 관념을 초월한 정신의 자유를 갈구하였다.

이 데뷔 시집의 서문에서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어째서 기쁜데?"라는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사리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있지만, "어떻게 기쁜데?"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쉽게 그 심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시인은 말한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 동시에 매우 복잡하다.
매우 보편성을 띠면서 동시에 매우 개성적으로 특이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자기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상황에서 말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거기에는 음악과 시가 있을 뿐이다.


- 「단편선 '고양이 마을' 옮긴이의 말 중에서」


시집 <우울한 고양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