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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이야기

모리 마리의 아빠 <모리 오가이>

며칠 전 모리 마리의 에세이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게 되면서 그녀가 모리 오가이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처럼 내게는 꽤나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모리 오가이' 책에서 보던 그 이름. 소설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소설도 몇 편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모리 마리와 같은 여성을 길러 낸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빠'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모리 마리라면 분명 나이가 들어서도 '아빠'라고 불렀을 것 같기 때문이다.)

 


모리 오가이 (1862~1922)

1862년 대대로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유신 후 집안 전체가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1년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로 입관했다. 1884년부터 4년간 독일에서 유학했고 귀국 후 육군 군의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해 소설, 수필, 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절제되고 정확한 문체로 한학과 서양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작품을 쓴 그는 1890년에는 베를린을 무대로 한 자전적인 연애소설 <무희>를 발표해 일본 작가들 사이에서 자전소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군의로서는 최고직인 군의총감을 지내 일본 중산층 교양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지성인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다.

 

 

 

 

<무희>는 오가이의 처녀작으로, 독일에서 교제한 여자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리고 출세를 위해 본국으로 귀국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오가이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엘리제라는 스물한 살의 독일 여성이 단신으로 일본까지 찾아왔다가 되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p.302

오가이의 장녀 이름 마리는 독일 여자 엘리제 (엘리제 마리 카트리네 비겔트)에서 따왔다고 하는 연구가 있다. -p.306


처음 서점에서 모리 마리의 에세이집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모리 마리'라는 이름이 주는 독특함에 그녀가 나와 동시대를 사는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연구가 사실이라면 모리 오가이는 마리를 볼 때 엘리제를 떠올렸을까?

엘레제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은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비겁함을 뉘우치는 하나의 방편이었을까?

아니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었을까?

문학을 하는 사람은 면도도 하지 않고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며 갖가지 데카당스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흔히 표현되지만, 오가이는 실제적 삶과 문학적 삶 모두에서 큰 성과를 거둔 작가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가이는 문학 그 자체보다는 문학을 즐기는 인간의 이상적인 전형으로서 교양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p.300


이 책에 실려있는 소설 <기러기><성적 인생>을 보면 위와 같은 오가이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오가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반듯하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성적 인생>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가나이 시즈카의 부모에 대한 것들이다.


가나이 시즈카가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시즈카도 이제 많이 컸으니 학교에 가기 전에 조금씩 배워두어야 한다"며 매일 아침 글자를 가르치거나 붓글씨를 연습시켰다.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 전에는 번의 하급 무사였으나, 그래도 토담에 둘러싸인 대문 달린 집에서 살았다. 문 앞에는 성을 둘러싼 해자가 있고 건너편에는 성의 창고가 있었다. -p.207 <성적 인생 中>

주인공의 가정형편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어찌 됐든 주인공 가나이는 여섯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열 살에는 아버지에게 조금씩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남들 모르게 도쿄로 이사를 갈 계획을 세운다.

열 살이 되었다.
아버지가 조금씩 영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도쿄로 이사를 가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때때로 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 때 귀를 기울이면, 어머니는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왜 남에게 말하면 좋지 않은지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모두가 도쿄에 가고 싶어 하니까 남에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p.211 <성적 인생 中>

가나이는 열한 살 때는 사립 독일어 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광산학을 공부시키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어 학교의 기숙사에서 가나이는 선배들에게 추행을 당할뻔한다.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한 가나이는 깜짝 놀랄 줄 알았던 아버지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말하자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도 살면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고난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열세 살에는 독일어를 그만두고 도쿄 영어학교에 들어간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가나이는 열네 살 때 하뉴라는 친구가 생긴다.
하뉴는 공부도 꽤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이의 아버지는 하뉴와의 교제를 그만두라고 한다.

아버지는 하뉴랑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지, 했다면 사실대로 고백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했다. 어쨌든 하뉴와는 앞으로 교제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어머니도 말했다. 네가 무슨 나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앞으로 하뉴라는 아이와 놀지 않으면 된다.
나는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솔직하게 하뉴가 요릿집에 데려갔다고 말했다. -p.243 <성적 인생 中>

외에도 주인공 가나이에게 조언과 관심을 내보이는 부모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아마도 모리 오가이의 부모님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관심과 노력이 자녀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교육이 모리 오가이를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지성인의 표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오가이에게서 '마리'와 같은 작가가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예출판사 

 


<성적 인생>의 원제는 라틴어 '비타 섹슈얼리스'로, 당시 잡지 ≪스바루≫에 게재되었으나 외설적이라 하여 잡지 자체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한 철학자가 여섯 살 때부터의 성적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한 형식의 자전적 소설이다. -p.307


그리고 이 <성적 인생>이라는 소설에서 나는 '모리 오가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내는 어차피 언젠가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싫은 여자는 곤란하다. 싫은지 좋은지는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자 입장에서도 싫은 남자를 만나면 곤란할 것이다. 낳아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효인 듯하나, 여자가 내 외모를 보고 좋게 생각하기란 좀 상상하기 어렵다. 자신의 평범함을 잘 아는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참아줄 필요는 없다. 그런 거라면 내가 거절하겠다.
그렇다면 내 영혼은 어떤가? 아주 훌륭한 영혼을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본바, 내 영혼은 부끄러워 감추고 싶을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영혼의 시험을 본다면 내가 반드시 낙제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결혼 풍습을 보자면 외모의 맞선은 있으나 영혼의 맞선은 없다. 외모의 맞선이라는 것조차 중매쟁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항상 상대방 얼굴은 볼 필요도 없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가 좋은지 싫은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봐서 좋은지 싫은지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자 부모는 딸을 파는 사람이고 나는 그것을 사는 사람이라도 된 듯하다. 여자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 만약 로마 법에 여자에 대해 쓰여 있다면, 노예처럼 여자라는 단어에도 '재산'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 것이다. 나는 예쁜 장난감을 사러 갈 마음이 없다. - p.274 <성적 인생 中>

나는 어떤 예술품이든 자기변호 아닌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 자체가 자기변호인 것이다. 모든 생물의 삶이 자기변호이다. 나뭇잎에 앉은 청개구리는 푸른색을 띠고 벽에 앉으면 흙색을 띤다. 풀숲에 출몰하는 도마뱀은 등에 녹색 줄무늬가 있다. 사막에 사는 것은 모래빛깔을 띤다. 의태는 곧 자기변호이다. 문장이 자기변호인 것도 같은 이치이다. - p.281/282 <성적 인생 中>

모리 마리의 자유분방함과 독특한 성품은 이런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모리 오가이는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마리는 최고, 마리는 최고, 눈도 최고, 눈썹도 최고, 코도 최고..."라고 반복해서 주문처럼 외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하는데, 칭찬으로 키우는 범주를 뛰어넘어, 춤을 가르치는 여선생이 "옷만 칭찬하고 마리는 칭찬하지 않았다"며 기분 나빠할 정도로 고슴도치 부모였습니다.

- 모리 마리의 에세이 '홍차와 장미의 나날' 작품 해설 中 -